서학서를 통해 자생적으로 시작된 천주교 신앙

조선 천주교의 시작은 글공부를 통해서였습니다.

선비의 나라 조선에서 양반들은 언제나 글을 가까이 하였으며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앙 또한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던 중에 생겨났습니다. 일찍이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펼치던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인들이 고유의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가졌으며 서양의 전반적인 학문과 세계관을 전하지 않고는 중국 선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서양의 과학, 철학, 음악, 지리학 등 다양한 지식을 한문으로 번역하여 중국인들의 의식세계를 넓히고자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목적으로 선교사들에 의해 집필된 한문서적을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또는 서학서라 부릅니다. 

17세기 초, 서학서가 처음 조선에 소개되었을 때,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서학을 무조건 배격해야한다는 비판부터 적극적으로 서학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16세기 말 저술한 ⟪천주실의(天主實義)의 한글어 역본. 서양인 학자와 중국인 학자의 대화와 문답 형식으로 엮어진 기독교 변증서로 17세기 조선에 전래되어 천주교 신앙의 탄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절두산순교성지 소장)

가장 보편적인 입장은 서양의 과학만을 받아들이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서양의 과학관을 전하면 자연스럽게 우주의 시작이자 만물을 창조한 조물주의 존재를 동양인도 인정하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천주교 신앙이 받아들여질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그러나 유교적 세계관에서 과학과 종교 서로 별개였기 때문에 다수의 조선 지식인들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고 서양의 천문학과 과학 기술에만 관심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서학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졌습니다. 18세기 중엽에는 서학을 접하지 않은 지식인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서학을 향한 높아지는 관심 가운데, 일부 지식인들은 서학 중에서도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유학을 발전 시키고자하는 보유론적(補儒論的)천주교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는 곧 천주교 신앙의 수용으로 이어졌습니다. 조선 천주교의 탄생을 예견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깊은 산골 눈 덮힌 주어사에서

특히 어느 겨울 날, 깊은 산골의 주어사라는 곳에서 열린 한 모임은 조선 땅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처음으로 천주교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결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명례방에서의 초기 종교집회도. 조선시대 초기 천주교인들은 지금의 을지로 2가에 위치한 김범우의 집에 모여 집회를 갖고 주일을 기념하였다. (김철태 1984, 절두산순교성지)

명례방에서의 초기 종교집회도. 조선시대 초기 천주교인들은 지금의 을지로 2가에 위치한 김범우의 집에 모여 집회를 갖고 주일을 기념하였다. (김철태 1984, 절두산순교성지)

주어사강학의 본래 목적은 유교 경전을 공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들은 모여 유교 경전을 공부하였고, 그 가운데  ‘천(天)’의 실체에 대해 큰 호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천'이란 무엇일까 고민하는 가운데 그들은 서학서에 소개된 천주교의 ‘천주(天主)’와 유교의 ‘천’을 연결하여 이해하게 되었고 이로써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기도생활, 파공(주일성수), 묵상 등의 천주교 가르침의 실천에도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유교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처음으로 접한 이들은 천주교가 유교의 이해를 돕고 유교를 보완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들의 신앙을 보유론적 천주교 신앙이라 부릅니다. 

 

조선의 베드로, 조선 교회의 반석

조선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베드로의 초상. 중국 사신으로 파견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 천주교회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다.  (서소문 선교성지 소장) 

조선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베드로의 초상. 중국 사신으로 파견된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가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 천주교회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한다. (서소문 선교성지 소장) 

주어사강학이 조선 최초의 신앙 운동으로 조선 교회의 탄생의 기초를 닦았다면,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의 세례는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자의 탄생으로 본격적인 조선 천주교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기점입니다. 

강학에 열심으로 참여했던 이벽(李檗, 1754∼1786)은 정조마저 그 학문적 탁월함에 감탄할 정도로 실력있는 학자였습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 더 알고 싶었으나 그 방도가 없어 답답해하던 중에 평소 가깝게 지내던 친구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 북경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천주교에 관하여 알려주며 북경에서 선교사를 찾아 세례를 받을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고, 천주당 안에는 천주교를 전교하는 서양 신부가 있다. 자네가 가서 그를 만나 신경 한 부를 구하고 아울러 세례 받기를 청하면, 신부가 반드시 그대를 아주 사랑하여 기묘하고 신기하며 보배로운 물건들을 많이 얻을 것이다. 반드시 빈손으로 돌아오지 말라'

이벽을 통하여 천주교를 처음 접한 이승훈은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를 만나 필담을 통해 천주교와 학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후 1784년 그라몽 신부(Jean Joseph de Grammont, 1736~1812)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승훈의 세례를 지켜본 한 예수회 신부는 아래와 같이 그 날의 모습을 기록하였습니다. 

조선으로 돌아온 이승훈은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학자들에게는 물론 양반사회 밖으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때문에 중인 층에서도 천주교 신자가 생겨났습니다.

이승훈이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 모습. 이승훈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던 중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베드로라는 이승훈의 세례명은 조선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탁희성, 절도산순교성지 소장) 

이승훈이 그라몽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 모습. 이승훈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던 중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베드로라는 이승훈의 세례명은 조선 교회의 반석이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탁희성, 절도산순교성지 소장) 

1784년, 이승훈은 서울 중구의 수표교 근처의 이벽의 집에 모여 정약용, 권일신 등 10명에게 대세를 베풀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가 태어난 1784년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 가운데 기념비적인 한 해가 되었습니다. 

조선은 단 한 명의 선교사도 없이 교리서 연구를 통해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였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도 이와 같이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곳은 없었습니다. 특별한 하느님의 뜻으로 조선의 천주교회가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