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선교사, 주문모 신부의 입국

주문모 신부의 초상.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신부로 1794년 12월 입국 이후 1801년 순교하기까지 조선 천주교회는 크게 성장하였다.   

주문모 신부의 초상.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신부로 1794년 12월 입국 이후 1801년 순교하기까지 조선 천주교회는 크게 성장하였다.   

1784년 시작된 조선의 자발적 신앙 공동체는 양반 계층을 넘어 중인 계층까지 퍼지며 점차 그 신도의 수가 더해갔습니다. 한편,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은 그곳에서 주교와 신부들이 거행하는 미사와 성사들을 보았고 조선에서도 이를 시행하고 싶었습니다. 교회법을 몰랐던 이승훈과 조선의 신자들은 주교에게 사제 서품을 주는 것은 주교만의 권리라는 것을 모르고 직접 신부를 뽑아 미사와 성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조선에 천주교 신자는 5년여 만에 1,000여 명에 이르게 되었으나 후에 자신들이 교회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매우 놀라 모든 성사를 중단시키고 중국의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으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합니다. 

구베아 주교는 답신을 통하여 조선 신도들에게 사제가 없을 경우의 신앙생활 방법과 여러 가지 질문에 답을 해 주는 동시에 곧 조선으로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지켜지기까지는 4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1794년 12월 23일 깊은 밤, 얼어붙은 압록강을 넘어 라자로회 소속 중국인 주문모 신부(周文謨, 1752∼1801)가 조선 땅에 들어왔습니다. 신부의 입국은 애타게 성사를 베풀어 줄 사제를 기다리던 신자들에게 단비와도 같았습니다. 신부는 서울과 지방을 돌아다니며 미사를 집행하고 필담을 통해 신자들에게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특히 신부는 신자들 가운데 회장들을 임명하여 교회에 지도자를 세우고 명도회(明道會)를 만들어 조선 교회를 체계화 시키고 커다란 성장을 이끌었습니다. 명도회는 정식 회원이 되기 전에 일 년간 교리를 공부하고 이를 남에게 가르치는 기간을 거쳐야만 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의 성적에 따라 입회 여부가 결정되었습니다. 남에게 교리를 전하는 것을 중점으로 하는 명도회의 선교활동으로 조선의 신자수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고 5년 만에 4천명에서 1만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조선 천주교회 박해의 시작, 1801년 신유박해

조선 천주교회는 날로 성장하였으나 평온도 잠시, 곧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선 천주교회사의 4대 박해라고 불리는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병인박해(1866~1873) 중 첫 번째 박해인 신유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19세기  정조(正祖, 1752~1800)가 죽고 순조(純祖, 1790~1834)가 왕위에 오르며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천주교에 대해 온건한 입장을 지켜온 정조와는 달리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시작한 대왕대비 김씨는 천주교에 호의적이었던 남인과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인 세력을 멸하기 위하여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과 지방 곳곳에서 천주교인들이 관아로 잡혀갔습니다.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탄핵하는 상소가 끊이질 않았습니다. 신도 수가 1만여 명에 이르며 상승세에 있던 천주교 신자들은 곳곳에서 집회를 벌이고 모여 기도문 외고 밤늦게 교리를 공부하곤 하였는데, 이때 포졸들은 집 밖으로 새어 나오는 기도 소리를 듣고 모임을 습격하였습니다. 또한, 붙잡힌 신자들을 고문하여 다른 천주교인들을 찾아내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1801년 2월 26일, 조선인으로서 첫 세례를 받은 이승훈과 명도회 초대회장 정약종(丁若鍾, 1760∼1801)을 포함하여 6명의 교회 지도자들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주문모 신부는 박해가 일어나자 중국으로 피신하고자 하였습니다만, 본인을 잡기 위해 자신과 관련된 많은 사람에게 고문을 가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자수하였고 5월 3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를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당시 조선 천주교회의 으뜸가는 신자 중 하나로 이름이 알려지고 수많은 사람을 전도하였던 황사영(黃嗣永, 1775∼1801) 또한 10월 순교하였습니다. 

박해는 겨울이 올 때까지 계속되어 12월 26일 16명의 순교를 마지막으로 300명 이상의 희생자를 낸 신유박해가 끝이 났습니다. 

조선시대 서소문(西小門)의 모습. 한국 천주교 성인 44명과 수많은 신자가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정식 명칭은 소의문(昭義門)으로 한양 서쪽에 위치하던 작은 문이다. 도성 내의 시체는 광희문과 서소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운반되었다. 1914년 일제 강점기 시절 철거되었다. 

 

다시금 조선교회를 일으키기 위하여 16번 북경을 찾아가다

신유박해가 조선 땅을 휩쓸고 간 이후, 신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박해를 받아 귀양 간 유배지에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고, 깊은 산골에서 모여 교우촌을 이루고 살면서 조선 천주교 역사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들이 가장 목말라 했던 것은 바로 성사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의 구원과 평화를 위하여 그들은 세례를 받고 고해를 드리며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성체 성사를 드리기 원했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사제가 필요했습니다. 1811년 조선의 신자들은 다시 한 번 북경에 연락을 하여 성직자 영입을 요청하기로 하였습니다.

서울과 지방의 신자들은 돈을 모아 신자 이여진을 북경에 보냈습니다. 이여진은 교황 비오 7세에게 올리는 편지 한 통과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 한 통을 품고 북경에 도착하였다. 무작정 북경에 도착한 이여진은 어디로 가야 신부를 만날 수 있는지 알지 못했으나 선교사들이 담배 만드는 법을 중국에 전했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담배 파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중에 부적이 없는 가게를 찾아 우연히 천주교 신자를 발견하여 라자로회 신부에게 서한을 건네주게 됩니다. 

북경에 편지를 쓰는 조선교회 지도자들. 1811년과 1826년 두차례에 걸쳐 조선 신자들은 교황청으로 편지를 보냈다. 한문으로 적힌 편지의 원본과 라틴어 번역본은 교황청 고문서고에 보관 중이다. (탁희성, 절두산순교성지)

편지는 전해졌지만, 동양권 선교를 책임지고 있던 마카오 포교성성의 자금난과 중국 땅에서 일어난 천주교 박해로 어려워진 북경 교회의 사정으로 인하여 조선으로의 성직자 파견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선교회는 성직자 영입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여진은 선교사 요청을 위해 북경에 총 두 차례 다녀왔는데, 이여진의 뒤를 이어 16번이나 북경을 방문한 신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초대 명도회 회장이자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의 아들 정하상(丁夏祥, 1795∼1839)입니다. 6세 때 아버지를 잃은 정하상은 그가 21세가 되던 1819년을 시작으로 1835년까지 총 16번 북경을 오가며 북경교회를 통하여 교황청에 지속적으로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였습니다.  

 

 

파리에 닿은 조선인의 편지

정하상은 그의 동료 유진길과 북경을 찾아가 조선인 신자들이 교황께 올리는 편지를 전달하였습니다.

1827년은 조선인 신자들의 편지는 1827년 로마 교황청에 도착하였고 교황청에서 선교를 담당하는 포교성성에서는 조선교회를 맡을 선교단체를 찾는 가운데 파리외방전교회에 연락을 하였습니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공동서한이라는 형식을 통해 전 세계의 모든 선교회 회원들에게 교황청의 제안을 알리고 의견을 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대부분 회의적이었습니다. 청나라의 천주교 박해와 자금난과 인력난으로 조선까지 선교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신자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편지가 마침내 교황청까지 닿았으나 그곳에서 희망이 끊어지는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파리에 닿은 그들의 편지는 당시 방콕에서 활동하고 있던 브뤼기에르 신부(Barthelemy Bruguiere, 1792~1835)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습니다. 

1829년 브뤼기에르 신부는 자신을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직접 교황청에 간청하였습니다. 마침 포교성성에서 직접 조선으로부터 편지를 받아 이를 파리 외방전교회에 전달하였던 카펠라리 추기경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로 새롭게 선출되면서 브뤼기에르 신부의 청은 마침내 수락되었습니다. 1831년 그레고리오 16세는 또한 조선교회를 교황청의 공인을 받은 지역교회로 인정하여 대목구로 지정한다는 소칙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조선 신자들의 끊이지 않는 노력과 염원이 로마와 파리에 닿아 조선 교회역사의 새로운 장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신부는 끝내 그가 그토록 그리던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으로 들어오기 위하여 마카오에서 북경으로 한 달여 만에 삼천 리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고 황하와 만리장성을 넘으며 삼 년 간 갖은 고생을 다 하였으나, 끝내 조선 입국을 앞두고 1835년 10월 20일 지금의 내몽골 지역의 마가자에서 병사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는 선종하였으나 그의 뒤를 이어 조선 선교의 꿈을 품고 뒤따라온 이가 있었으니 바로 모방 신부(Pierre Philibert Maubant, 1803-1839)였습니다.

프랑스인 선교사로는 처음으로 조선 땅을 밟은 모방 신부는 1835년 1월 12일 중국 국경을 넘어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 이후 조선은 35년 만에 다시금 사제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후  1836년 12월 31일 샤스탕 신부((Jacques Honore Chastan, 1803-1839)와 1837년 12월 18일 앵베르 주교(Laurent Marie Joseph Imbert 1796-1839)가 이어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들어왔습니다.

 

프랑스에서 온 신부, 조선에 첫발을 내딛다

35년 만에 처음으로 사제를 보게 된 조선의 신자들은 너도나도 서둘러 성사를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신부들은 조선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조선의 지리를 익히고 교우촌을 파악해갔습니다.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조선인 사제의 양성을 위하여 당시 소년이었던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로 파견하였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의 제일가는 선교방침이 바로 방인사제의 양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샤스탕 신부는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 충청도와 강원도 지역에서 6개월 동안 샤스탕 신부 혼자 베푼 성사가 세례만 800여 건, 보례 800여 건, 고해 1,000여 건, 영성체 900여 건이라 기록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약 6천여 명의 신자가 있었으며 샤스탕 신부는  그가 가는 곳마다 성사를 받기 위해 신자들이 떼로 몰려들었지만 고해성사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지역이 많았기에 성사를 주는 것이 어려웠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신부들은 조선어 공부와 더불어 끊임없이 조선 곳곳을 돌아다녀야 했으며 고된 생활을 계속해야만 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새남터를 적시고

앵베르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선교활동을 펼치는 동안 조정에서는 세력교체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동안 권력을 잡고 있던 안동 김씨 가문은 천주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순조 시절 상당한 권력가였던 김유근(金逌根, 1785~1840)은 정하상과 함께 조선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을 왕래하던 유진길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모방 신부가 천주교 보호자라고 부를 정도로 천주교에 우호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순조가 죽고 김유근도 곧 사망하고 나니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헌종(憲宗, 1834~1849)이 즉위하며 조정에서는 새롭게 권력을 차지하려는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자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838년 겨울, 한양 곳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전국적으로 피바람이 불기 시작하였습니다. 

북경을 오가며 교황에게 편지를 올렸던 정하상과 유진길 또한 체포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앵베르 주교를 천주교의 우두머리라고 생각하고 프랑스 선교사들을 계속하여 좇았습니다. 자신을 잡기 위해 포졸들이 조선 신자들을 체포하고 고문하는 것을 보고 앵베르 주교는 8월 11일 스스로 포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도 자수를 권고하였습니다. 샤스탕 신부와 모방 신부 또한 9월 6일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이들은 모두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기해일기⟫는 기해박해 때 참수형을 받은 순교자가 54명, 그 외 옥중에서 사망하거나 고문으로 사망한 자가 60여 명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해박해는 비록 그 순교자 수는 적었어도 조선 교회 지도층이 많이 체포되어 한국 천주교회에 큰 타격을 가했습니다. 하지만 전국적으로 시행된 박해를 통해 많은 조선인이 오히려 천주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앞으로 다가올 한국 천주교회의 성장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소년 김대건, 최초의 조선인 사제가 되어 돌아오다

조선에 처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은 프랑스인 선교사 모방 신부는 비록 1839년 순교하였지만, 그가 뿌린 씨앗은 조선 밖에서 계속하여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모방 신부에 의해 1835년 마카오로 보내졌던 소년 김대건과 최양업이 신부가 되어 조선에 돌아온 것입니다. 

김대건(金大建, 1821~1846)은 1845년 1월 15일 한양에 도착하였습니다.  아직까지 박해의 기운이 아직 남아있기에 그는 자신의 귀국을 어머니에게조차 알리지 못하고 숨어서 비밀리에 다른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도록 준비하였습니다. 지금의 서울 석정동에 선교사들의 거처를 마련한 후 조선전도를 갖고 김대건은 1845년 4월 30일, 다른 신부들을 조선에 데려오기 위하여 제물포를 출발하였습니다. 폭풍우와 굶주림, 탈진으로 목숨을 건 항해를 마치고 6월 4일 상해에 도착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Jean Joseph Ferreol 1808∼1853)로부터 사제품을 받았습니다. 최초의 조선인 사제가 탄생한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는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Marie Antoine Nicolas Daveluy, 1818~1866)를 태우고 제주도를 거쳐 1845년 10월 12일 충청도 강경에 도착하였습니다. 1835년 마카오로 떠났던 소년이 10년 후, 스스로 신부의 몸으로 나아가 다른 선교사를 태우고 고립되었던 조선교회와 세상과의 다리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1846 병오박해, 김대건 신부의 순교

김대건 신부는 조선에 돌아온 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를 개척하기 위해 중국어선과 교류하며 해상 입국 경로를 알아보던 중이었습니다. 조선군이 중국 배들을 잡아들이려고 하자 김대건 신부가 이를 제지하여 의심을 사게 되었고 체포 당시 지니고 있던 천주교 서적과 성화를 통해 천주교 신자인 것이 들통난 것입니다. 

마침,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어 옥에 갇혀있는 도중 조선에는 프랑스 군함 3척이 찾아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앵베르 주교의 살해에 대해 항의하는 서한을 전하고 떠나갔고, 조정에서는 김대건 신부가 프랑스 군함을 불러들였다고 믿고 김대건 신부를 역적으로 다스리기로 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옥 중에서도 옥에 갇힌 자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주변 사람들을 격려하였습니다. 그는 40여 차례의 문초를 받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고문을 받은 것에 감사하다'며 페레올 주교에게 마지막 편지에서 감사를 전했습니다.

마지막 처형을 당하면서도 그는 사형수와 그 자리에 모인 자들에게 천주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846년 9월 16일, 김대건 신부는 7년 전 모방・샤스탕 신부와 앵베르 주교가 순교했던 새남터에서 그들과 같이 군문효수형을 받아 만 25세의 나이로 순교하였습니다. 이어서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8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하며 병오박해가 마무리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