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분서주 밤낮없는 선교사의 헌신으로 

천주교 신자들은 계속된 탄압과 박해를 이겨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번 뿌리를 내린 나무는 계속하여 가지를 뻗어내듯 조선 천주교 신앙의 나무 또한 계속하여 자라나고 끊임없이 열매를 맺었습니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가 단둘이 조선대목구를 보살피며 점차 기력이 쇠할 때쯤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서 수학하였던 최양업(崔良業, 1821∼1861)이 신부가 되어 1849년 입국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는 그동안 조선으로 돌아오고자 여러 번 시도하던 끝에 13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1856년과 1856년 메르스트, 프티니콜라, 푸르티에, 페롱 신부와 베르뇌 주교가 조선에 입국하였습니다. 도중에 병으로 선종한 페레올 주교를 제외하고 조선에는 총 7명의 사제가 머물게 된 것입니다. 

사제들은 밤낮없이 일하며 동분서주 조선 땅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신자에게 성사를 베풀고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사제가 부족할 때에는 신부 한 명이 일 년에 4,500명의 고해를 듣고 7천 리가 넘는 거리를 순방해야 했습니다. 콜레라가 창궐할 때에는 죽기 전 고해성사를 받으려는 신도들이 물 밀듯 몰려와 사제 한 명이 몇 주 만에 1,500명 이상의 고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신학교 설립과 사회구호활동까지

성사를 베푸는 것 외에도 선교사들은 여러 사업을 벌였습니다.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신부는 조선에서 그동안 일어난 목격자와 증인들을 만나 선교활동과 박해, 순교의 역사를 자세히 조사하고 정리하였습니다. 

또한, 교리에 무지한 조선 신자들을 위하여 최양업 신부는 한글로 된 교회 서적을 편찬하였고 다블뤼 주교는 이를 보급하기 위하여 울에 인쇄소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로써 조선 신자들은 한글로 된 기도서, 교리서를 통해 쉽게 천주교 신앙을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특히, 최양업 신부는 글을 읽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 천주교의 교리와 기도서, 그리고 순교 성인들의 신앙을 기리는 천주가사를 만들어 보급하였는데, 천주가사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여성과 하층민 신도들의 수가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한편, 사제들은 현지인 성직자 양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방침에 따라 배론 신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비록 초라하고 환기가 잘 안 되는 작은 초가집에서 몇 명 되지 않은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공부했습니다만, 병인박해 이전까지 꾸준히 신학 교육이 이루어졌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이루어지던 구호사업인 영해회 사업을 조선에서 실시하기도 하였습니다. 영해회 사업이란 버려진 어린아이들을 거두어 신자의 집에 맡겨 양육하는 사업으로 조선에서도 1854년 메르스트 신부에 의해 시작되어 한 해에 40~50여 명의 아이를 지원하였습니다. 

 

1931년 옛 배론신학교를 방문한 정규하 신부 일행. 배론신학교는 1855년 설립되어 병인박해가 일어난 1866년까지 신학교육이 이루어졌다. (성신여자대학교 성신교정 소장 사진)

배론성지의 복원된 옛 배론신학교 건물의 모습. 충청북도 제천시에 위치한 배론성지에는 배론신학교의 터와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성신여자대학교 성신교정 소장 사진)

배론성지의 복원된 옛 배론신학교 건물의 모습. 충청북도 제천시에 위치한 배론성지에는 배론신학교의 터와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모셔져 있다. (성신여자대학교 성신교정 소장 사진)

 

신앙을 찾아 떠난 조선의 카타콤베, 교우촌의 신자들 

조선의 신자들은 일찍이 신앙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비신자들의 눈을 피하고 박해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점차 숲 속으로 숨어 들었고 교우촌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교우촌 모습. 많은 조선시대 가톨릭 신자들이 옹기를 만들어 생업을 이어나갔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사진)

교우촌 신자들은 좁은 땅에서 경작할 수 있는 담배 농사를 짓거나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지었으며, 많은 수가 옹기를 만들어 팔기도 하였습니다. 산속에 사는 신자들은 쉽게 흙을 구할 수 있었으며 옹기 안에 성물을 숨기고 이동하기도 편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옹기를 팔러 다니며 교우촌 간에 소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교우촌에서 신분과 관계없이 서로 돕고 나누며 살아간 신자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하느님의 가르침 따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선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도 교우촌 신자들만은 서로 먹을 것을 나누었기 때문에 굶어 죽는 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한티성지. 경북 칠곡군에 위치한 한티성지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 속으로 들어온 천주교인들의 교우촌이 있던 곳이다. 병인박해 때 포졸들이 마을로 들어와 배교하지 않는 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성지 곳곳에 순교자의 묘역이 있다.

1846년 앵베르 주교와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가 순교하기 직전에 남긴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조선에는 약 1만여 명의 신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인 신자들이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선교사들의 헌신에 힘입어 1859년에는 16,700명, 1865년에는 23,000명까지 조선의 천주교회는 성장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