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대박해의 시작

한국 천주교회는 1866년이 되기 전까지 발전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선교사들은 희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자의 증가, 천주교에 대한 인식의 변화, 영국군의 북경 점령은 희망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내 정치 상황은 점차 천주교를 박해하는 당파에 기울어지고 있었다는 점과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조선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점점 두려움이 커져만 갔습니다.

결국 두려움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은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택하였고 천주교를 서양 앞잡이로 지목하고 천주교를 탄압하였습니다. 8,000여 명의 순교자를 낸 조선 최대의 박해이자 최후의 박해인 병인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프랑스 선교사 9명의 순교

가장 먼저 체포된 사람은 베르뇌 주교(Simeon Francois Berneux, 1814-1866)였습니다. 이어서 남대문 밖에서 머무르던 브르트니에르 신부(Simon Marie Antoine Bretenieres, 1838-1866)가 체포되었습니다. 브르트니에르 신부는 베르뇌 주교가 잡혔다는 것을 알았으나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경기도에서 도리 신부(Pierre Henri Dorie,1839~1866), 볼리외 신부가 붙잡혔다. 이들 신부 또한 주변의 신자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에 자신의 집에 혼자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베르뇌 주교와 브뢰트니에르 신부, 도리 신부, 볼리외 신부는 모두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이어서 배론 신학교 부근에서 체포된 푸르티에 신부(Jean Antoine Pourthie, 1830∼1866)와 프티니콜라(Michel Alexandre Petitnicolas, 1828~1866) 신부 또한 3월 11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같은 날 3월 11일,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Martin Luc Huin, 1836~1866)와 오메트르 신부(Pierre Aumaitre, 1837∼1866) 또한 붙잡혔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포졸들이 그가 머물고 있던 거더리 마을에 찾아오자 신자들의 간청으로 장작더미 안에 숨어있었으나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포졸들이 주교에게 다른 신부들의 거처를 묻자 다블뤼 주교는 위앵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를 불러들였습니다. 위앵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 역시 다른 신자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기 위하여 다블뤼 주교가 있는 곳으로 나아왔습니다. 

서울로 압송된 세 명의 선교사는 3월 30일 갈매못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처형된 선교사 가운데 다블뤼 주교는 21년간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로 가장 오래 활동한 선교사였으며,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위앵 신부는 모두 조선에 들어온 지 6개월이 지나고 선교하였습니다. 

1864년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들. (파리 외방전교회 소장)

병인박해 때 조선에 있던 12명의 선교사 가운데 9명이 순교하였고 나머지 3명의 선교사는 중국으로 탈출하였습니다. 많은 선교사가 순교하였지만, 병인박해는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그칠 줄 모르는 박해의 바람

충청남도 보령의 갈매못순교성지

오히려 박해는 더욱 심해졌는데, 병인양요오페르트 도굴 사건, 신미양요 때문입니다.

1866년 10월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하며 프랑스인 신부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질 것과 문호개방을 요구한 신미양요 사건을 두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그로 인해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 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라며 박해에 박차를 더했습니다. 이 때 수 많은 신자가 처형된 양화진은 천주교인들의 피로 적셔졌다고 하여 지금은 절두산성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1868년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지를 도굴을 시도한 오페르트 도굴사건과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도로 침입한 신미양요 사건 모두 박해에 불을 붙였습니다.

박해는 흥선대원군이 물러가는 1873년 12월 24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1886년부터 1873년까지 진행된 병인박해 는 총 8,000명의 조선인 신자와 9명의 프랑스 선교사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순교자의 종말은 모두 선종이라

1764년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100여 년의 역사를 지나며 1만여 명에 가까운 신자가 순교하였습니다. 뿌리 깊은 유교 전통을 가졌던 나라에서 짧은 기간 동안 어떻게 이렇게 수많은 신자가 생기고 순교 성인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조선은 외세로부터 굳게 문을 닫았던 탓에 그 기간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사제는 20여 명에 불과했는데 말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의 씨앗’이라 하였습니다. 박해는 많은 신자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하지만 순교의 위협이 조선 천주교회의 성장을 막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순교자들의 피는 조선 땅과 신자들의 마음에 깊이 스며들어 교회의 성장을 불러왔습니다.

사람이 제 목숨을 다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을 불교에서는 입적, 개신교에서는 소천, 가톨릭에서는 선종 혹은 선생복종이라고 합니다. 선하게 살다가 복되게 죽는다는 뜻의 선생복종(善生福終). 모든 순교자의 죽음은 하느님의 뜻 가운데 그들을 진리와 그분의 선하심으로 이끌었던 선한 종말이었던 것입니다.